부산동별유래 중구4 소개
안녕하세요.
부산 풀싸롱입니다.
오늘은 부산동별유래 중에서 중구의 신창동, 영주동의 동별유래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산동별유래 중구4
신창동
신창동(新昌洞)은 숙종 4년(1678) 두모포왜관에서 이건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98년 동안이나 존속하였고, 그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계속 존속하였다.
초량왜관의 주요 건물은 조선정부에서 지어준 동관과 서관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동관(東館)은 광복동과 동광동 쪽이고, 서관(西館)은 신창동과 창선동 쪽이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개시대청 등의 3대청이, 서관에는 동대청, 중대청, 서대청의 3대청이 이었고, 각 대청에는 동헌, 서헌과 2개의 행랑이 있었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초량왜관은 일본인거류지로 일본인 단독조계가 설치되었다. 1914년 부산부 관할구역에 보면 신창동은 서정(西町)으로 그 명칭이 이름지어졌다. 이곳은 일본인의 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 있었던 곳이다.
광복 이후인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칭 때 서정(西町)을 신창동(新昌洞)으로 개칭하였다. 1956년 7월 시조례로 법정동인 신창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편입시켜 관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신창동1,2,3,4가가 있다.
영주동
영주동(瀛州洞)의 옛 이름을 임소(任所)라 하였다. 이 임소의 유래는 감리서(監理署) 설치에서 비롯되었다. 개항 후 외교통상의 업무량이 늘어나자, 고종 27년(1890)부터 업무처리를 위하여 감리서가 설치되었다.
그 관아는 지금의 봉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그 자취는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감리서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또 관원이 근무하는 직소(職所)라는 뜻에서 임소라 불렀다.
그리고 영선고개는 영선산(瀛仙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영선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영선(瀛仙)이 아니고 용선(容膳)이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영선이라는 설로 이 산에서 왜관안의 일본인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 고개 밑에 동관문이 있어 쌍방이 선물을 보낼 때에는 감리에게 허가를 받으면 역관이 이곳까지 와서 입회한 상태에서 용인(容認) 선물(膳物)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거나 견강부회(牽强附會)한 느낌이 든다.
또 다른 한 설은 영선산(瀛仙山)이 두 개의 봉우리로 양산(兩山) 또는 쌍악(雙岳)이라고 했는데 숙종 때
두모포왜관을 초량왜관으로 이설 할 때, 초량왜관을 건축하고 수리하는 재목이 이 고개를 통해 운반되었고, 또 일부의 부재는 이 산에서 공급되었기 때문에 영선산이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두산 주위에 초량왜관이 설치되고 그 초량왜관의 수문 밖에는 초량왜관을 관리하는
조선측의 관위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의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자리에는 초량객사(역대 국왕의 전패를 모셔 놓은 곳)가 있었다. 그때는 지금의 영선고개에서 동쪽 바다를 향해 영선산이 두 봉우리로
솟아 바다 저 멀리를 바라보는 경관이 아주 좋았다. 그런 자리에 지금의 외교관이자 통역관격인
훈도가 집무하는 성신당(誠信堂)과 별차(別差)가 집무하는 빈일헌(賓日軒) 들이 있었다.
그 훈도와 별차들이 자기들이 있는 곳을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빗댄 말에서
영주란 마을 이름이 형성되었다. 지금의 영주1동 5, 9, 11번지 일대와 초량1동 562-3번지 일대에
자연마을인 청관마을이 있었다.
출처 부산시청
부산동별유래 중구4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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