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동별유래 부산진구1

부산동별유래 부산진구1 소개

안녕하세요.
부산 풀싸롱입니다.

오늘은 부산 풀싸롱과 함께 부산진구 연혁과 가야동의 동별유래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산동별유래 부산진구1

부산진구

연혁

부산지역의 선사유적은 최근에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지역에서 새로 알려진 좌동과 청사포 일대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신석기유적은 동삼동․다대동 등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부산진구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유적지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석기시대 이전에 사람이 거주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의 분포양상도 청동기의 유적 분포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사람이 점차 해안지대에서 내륙 구릉지대로 이동하여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진구지역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이 동평현(현 당감동)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철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삼한

삼국시대의 부산진구지역은 변한의 소국의 하나인, 거칠산국(居漆山國)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칠산국이『삼국사기』권44, 거도전에 의하면, “석탈해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부산진구 지역도 신라에 의해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
『삼국사기』권34, 지리1 동평현조에 의하면, “동평현은 본래 대중현이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그대로 쓰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일찍이 신라에 정복당한 후 대증현으로 편제되었다.

그것은 당감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5~6세기의 유물들이 신라유물의 영향을 받았던 것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신라는 경덕왕 16년(757)에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때 대증현도 동평현으로 개칭되었다. 이 시기 동평현은 동래군의 속현이었기 때문에 지방관은 파견되지 않았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동평현의 영현이었던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면서 울주군에 영속되자, 동평현도 양주군에 속했다.
동래군은 고려후기에 다시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나 동평현은 계속 양주군의 지배를 받았다.
고려후기에는 각 지역에 존재하는 성을 축성․정비하였는데, 동평성도 이때 수축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고려말부터 왜구의 침략이 남해안에 계속되자 동래현을 동래군으로 다시 승격시켜 양주에 속했던 동평현은 동래군에 소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도 얼마되지 않아 곧 태종 9년(1409)에 다시
양주에 영속되었다가 세종 10년(1428)에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다.
명종 2년(1547) 에는 동평현은 동평면으로 개칭하여 동래부에 속하게 되었다.

일제시기 초

일제시기 초 1914년 동래부를 부산부와 동래부 일부에 기장군을 편입하여 동래군으로 나누었다.
부산진구지역은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부산진출장소(초읍․연지․범전․부전․양정․전포․부암․당감․가야․개금동)가 설치되어 부산부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1938년에는 동래군의 구포읍과 사상면이 부산시에 편입되어 부산진구의 관할 사상출장소와
구포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에는 부산진구 북부출장소 관할구역이 북구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현재의 관할동은 가야동․
개금동․당감동․범전동․범천동․부암동․부전동․양정동․연지동․전포동․초읍동 등이 있다.

가야동

가야동(伽倻洞)의 유래는『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가야리는 동평면에 속한 지역으로 관문에서
2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리는 어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직 학계에서 정론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6가야의 가야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옛날 지금의 구관, 즉 수정동 으로부터 감고개를 넘어 가야동으로 왕래하였던 까닭에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되었다.
가야리란 명칭은 이 감고개 아래의 마을이란 뜻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1904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동평면과 단절되고 대신 서면의 가야리로 되었다.
1903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조선의 성씨에 의하면, 달성 서씨가 정착하여 살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체로 16대(代)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전후에 이주해 온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1959년 개금동을 흡수하였다가, 1963년 다시 가야동과 개금동으로 분동하였다.
1970년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가야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9년 가야2동을 다시 가야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연마을로는 가야리, 상리, 중리마을이 있었다.

출처 부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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