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동별유래 서구1

부산동별유래 서구1 소개

안녕하세요.
부산 풀싸롱입니다.

오늘은 부산 풀싸롱과 함께 부산 서부의 연혁과 남부민동, 동대신동 동별유래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산동별유래 서구1

연혁

서구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일제시기에 암남동
조개무지(패총)에서 무늬있는 토기 등이 발견되었던 것으로 보아 신석기 말기에는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동대신동(현 동아대) 지역에서 마제석검 등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서구지역은 삼한의 변진 12국중 거칠산국의 영역에 속했다가 6세기초, 신라의
영토팽창으로 신라에 병합되어 거칠산군에 편제되었을 것이다. 경덕왕 16년(757) 지방제도
개편 때 동래군으로, 대증현도 동평현으로 개칭됨에 따라 동래군의 속현인 동평현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현종 12년(1021) 지방제도 개편 때 동래군이 현으로 강등되어 울주군에 영속되자,
동평현도 양주군의 속현이되었다. 동래군은 고려후기에 다시 지방관이 파견되었으나 동평현은
계속 양주군의 지배를 받았다.
조선시대 동래는 태조 6년(1397)에 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이곳에 진을 설치하게 되자, 진의 장수인
병마사가 동래현의 행정관인 판현사를 겸임하였다. 태종 9년(1409)에 다시 양주(현 양산)에 영속되었다가 세종 10년(1428)에 동래현의 속현이 되었다. 동왕 22년에는 진을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환진하였다. 명종 2년(1547) 에는 동평현은 동평면으로 개칭되어 동래부에 속하게 되었다.

서구의 행정구역 변천을 보면,『동래부지(1740)』의 기록에 의하면, 동래부의 행정구역이 읍내면․
남촌면․사천면․동평면․서면․북면 등의 7개면으로 되어 있었는데, 상단은 오늘의 사상구․북구지역이고,
하단은 신초량리․구초량리․대치리․목장리․감천리․독지리․서평리․다대리 등의 9개리로써 구초량리․
대치리 등이 현 서구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910년 일제강점으로 동래부가 부산부로 바꾸고, 1914년에는 관할구역이 변경되면서
오늘날 중구․서구․동구․영도구 지역은 부산부에 편입됨에 따라 서구지역도 부산부에 속하게 되었다.

1947년 10월 1일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개칭하였고, 1949년 8월 15일 부제(府制)를 시제(市制)로
바꾸어 부산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구라는 명칭은 광복 후에는 1951년 구제 실시를 전제로 6개의 출장소가 설치되었는데,
옛 부산시청(중앙동)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서부출장소라 하였다.
그 후 1957년에 비로소 구제로 변경되면서 서구가 되었다. 1975년 구직할의 사하출장소가
시직할 출장소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는 서구에서 사하구가 분구되어 나아갔다.

서구는 전형적인 배산임해지역으로 부산 남항과 송도해수욕장, 암남공원 등 천혜의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형성된 기존시가지, 법원, 교육기관 등 공공시설이 집중되어 있어 주거․교육도시로서의
전통을 자랑하고 공동어시장이 소재해 있어 전국수산물의 30%를 담당하는 등 수산물 유통․가공지로서
명승을 떨치고 있다. 서구의 관할 동은 동대신동․서대신동․부용동․부민동․토성동․아미동․초장동․충무동․
남부민동․암남동 등이 있다.

남부민동

남부민동(南富民洞)은 부민동에 속해 있다가 1914년 부산부제가 실시되면서 남부민동으로 분리하여
나온 동이며, 본래는 부민동과 함께 부민포(富民浦)로 불리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의 옛 이름은 「샛디」인 셈이다. 일부에서는「샛디」를「신성(新姓)」이라고 풀이하여 구초량을 하단으로 비정하고 있다. 하지만 샛디는 초량이라는 뜻으로 구초량을 의미한다. 「샛디」는 남부민동과
초장동 일대의 옛 지명이며,「샛디재」는 충무로 광장에서 송도로 가는 윗길 입구의 고개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송도로 가는 아랫길은 없었고, 또 송도가 바로 바닷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송도로
가려면 배를 타지 않는 한 이「샛디재」를 넘어가야 했다. 이 지역의 故老들중에는 아직까지도 이 곳을
「샛디」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1914년 앞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운 터를 만들었는데, 이때 부민동 남쪽에 있다하여 남부민정이라
하였다가,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정 때 남부민동으로 바꾸었다. 1959년 남부민1,2동으로 분동,
1970년 남부민2동을 2,3동으로 분동되었다.

동대신동

동대신동(東大新洞)의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또는 「고분도리」이다. 딱박골 또는 딱밭골 등은
닥밭골을 말하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로는 보수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도 한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고불」·「드르」에서 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블」은 고리짝을 말하며,「드르」는 들을 말하므로 「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 된다.
닥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 들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부곡(部曲)」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동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으로 추정되며, 보수천의 호안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한」은 큰길을
한길이라 하듯이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 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대신동은 일본인 주거지가 되기 이전까지는 부민포에 속하기도 하고, 대치리의 일부에 속하기도
하던 곳이 대신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되었다.
동대신동은 1926년 동대신정과 서대신정으로 구분하게 되었고, 광복 이후 1947년 동명개칭 때
동대신동으로 바뀌었다.
1959년 1월 동명개정 행정동인 동대신1,2,3동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동대신동1,2,3가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신리, 동산리, 북산리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출처 부산시청

부산동별유래 서구1 소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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