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동별유래 중구5

부산동별유래 중구5 소개

안녕하세요.
부산 풀싸롱입니다.

오늘은 부산 풀싸롱과 함께 부산동별유래 중에서 중구의 중앙동과 창선동의 동별유래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산동별유래 중구5

중앙동

중앙동(中央洞)은 영선산 아래의 골짜기의 맞은 언덕빼기 산봉우리가 해면(海面)에 돌출해 있었다.
이 두 개의 봉우리는 용두산의 좌청룡등(左靑龍嶝)에 해당된다고 한다.
두 봉우리의 사이에는 논이 있었는데 그 곳을 논치라고 불렀으며, 산 아래의 좌우에는 논치어장이 있었다. 이 논치어장은 현재의 중부경찰서 남쪽에 있는 중앙동 지역내의 유일한 고유지명으로 알려진 것이다.
개항 이후 중앙동 거리 바로 아래지역은 바닷가였으므로 당시에는 시가지의 발전은 어려웠다.
당시 초량왜관은 약 330,000㎡이라 하지만 그 중앙에 용두산(龍頭山)이 자리하고 있어 실제 사용 가능한
면적은 231,00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해안을 매축하여 시가지를 형성할 목적으로 1902년에 부산매축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이를 중심으로 북빈매축공사가 추진되었다.
이때 매축하여 새긴 지역의 이름으로 이른바 새마당이며, 새로 생긴 넓은 땅이란 뜻이다.
이곳을 일제강점기 때에는 매축허가를 받은 일본인의 이름을 딴 좌등정(佐藤町)·대창정(大昌町)·
고도정(高島町)·경부정(京釜町) 등으로 명명되었는데, 이중 좌등정과 고도정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매립허가를 내준 일본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며, 경부정은 경부선 철도의 시발지였다는 데서,
대창정은 부두에서 하역관계로 큰 창고가 있는 데서 각각 붙여진 명칭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이 일대는 주로 대창정이라는 지명으로 대표되었다. 광복 이후 부산역(지금의 본부세관 맞은편
소화물 취급소)을 가진 중앙부에 위치하여 있다는 뜻에서 1947년 동명개정 때 중앙동으로 개칭하였다.
법정동으로 중앙동1,2,3,4가가 있다. 1982년 5월 시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대교1,2,3가를 중앙동
5,6,7가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선동

창선동(昌善洞)은 신창동과 마찬가지로 숙종 4년(1678) 두모포왜관에서 이건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98년 동안이나 존속하였고, 그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계속 존속하였다.
초량왜관의 중요건물은 조선정부에서 지어준 동관과 서관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동관은 광복동과
동광동 쪽이고, 서관은 신창동과 창선동 쪽이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 개시대청 등의 3대청이 있었고, 서관에는 동대청·중대청·서대청의
3대청이 이었고, 각 대청에는 동헌·서헌과 2개의 행랑이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한 강점이후 일본인 거류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 4월 부산부 관할구역에 보면,
신창동은 행정(幸町)으로 그 명칭이 이름지어 졌다. 이곳은 일본인들의 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1884년에는 부산전신국을 개설하여 업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철수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돗떼기, 깡통시장이라 하는 오늘날의
국제시장이 생겨 부산과 경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정 때 행정을 창선동(昌善洞)으로 개칭하였다. 1956년 7월 시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창선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병합하여 행정관련 업무를 관장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창신동1,2가가 있다.

출처 부산시청

부산동별유래 중구5 소개 끝

부산 풀싸롱 부산동별유래 중구5

홈으로

부산 풀싸롱 부산동별유래 중구5

호빠야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